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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박연준의 첫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은 다시 구매한 시집이다. 시집을 정리하던 시기, 시인의 시집을 한 권씩만 소장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이 시집을 다시 찾게 되었다. 이 시집을 처음 읽었을 때의 기억을 더듬는다. 아마도 제목에 끌려 구매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 뒤로 박연준의 다른 시집도 만났고 최근에 창비에서 나온 시집은 아직이다. 속눈썹은 내가 좋아하는 단어다. 내가 아는 의미로 속눈썹이 흔들리는 시간을 아는 이를 만났을 때 얼마나 반가웠던가. 하나의 시집은 이렇게 시가 아닌 다른 것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읽는 시는 이런 시.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이따금 한번씩은 비를 맞아야 동그랗게 휜 척추를 깨우고, 주름을펼 수 있다우산은 많은 날들을 집 안 구석에서 기다리며 보낸다눈을 감고, 기다리는 데 마음을 기울인다벽에 매달린 우산은, 많은 비들을 기억한다머리꼭지에서부터 등줄기, 온몸 구석구석 핥아주던수많은 비의 혀들, 비의 투명한 율동을 기억한다벽에 매달려 온몸을 접은 채, 그 많은 비들을 추억하며그러나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우산」, 전문
신선하고 패기 넘치는 작품으로 등단(2004 중앙신인문학상) 당시부터 화제를 모은 박연준의 첫시집. 신세대 시인답게 시집 전반에 걸쳐 기성세대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을 반영하는 거침없는 어법, 도발적인 시어들을 선사하고, 여성의 몸이나 섹스에 대해서도 거리낌없이 발언한다. 단지 소재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인식, 시적 사유에서 기존 문법을 파괴하고 화자의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한 전략의 차원에서도 이 신인의 어법은 단연 돋보인다. 타자와 자아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을 통해 새로운 소통의 장을 열고자 열망하는 그의 작품들은 젊은 시단에서 독특하고도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제1부

나의 탄생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봄의 장송곡
얼음을 주세요
껍질이 있는 생에게
나비-마이크에 매달려 독백으로
겨울, 점점 여리게
겨울은 활활 나를 태우고
꽃을 사육하는 아버지
안녕?

앵두와 아버지
스물다섯

제2부

봄밤
일곱 달을 내리 우는 고양이에 대하여
안티고네의 잠
부엌 01:35 a.m.
연애편지
연애편지 2
눈을 감고, 기억을 흔들면
싹이 난 감자
방충망 작은 틈새로
후무사
늙은 연둣빛, 터널
일곱살
기울어진 방
생일
발과 자궁

제3부

겨울은 아무데서나 눕고, 흐르다, 무거워진다
새벽 2시
흔적
낡은 양복을 입은 남자
이별
빗물
아버지의 방
시를 쓴다
문 열린 판도라상자 속에서
별이 박힌 짐승에게
나비처럼 가벼운 이별
모기가 입술에게
겨울, 그네처럼
밤 11시
푸줏간 소년
그 머슴애, 지금
에필로그

제4부

달의 상상임신
장미
우산
한겨울의 나비
나의 탄생 2
화장
해바라기, 노란 휠체어 속
일곱살, 달밤
광주 알코홀릭 병원에서
가난한 집 장롱 위에는
타락한 캔디의 독백

해설│김수이
시인의 말